저널응접실/홍정희서양화가





불혹의 나이를 훌쩍 넘긴 나이에 화가의 길로 들어서 ‘ 한국인고유의 생활풍습을 바탕으로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의 삶을 그림으로 형상화 한’ 작가로 평가받는 서양화가 홍정희(56세)화백. 생계를 위해 돈을 벌다 KBS탤런트 공채시험에 합격한 홍정희화백은 연기자의 길을 접고 고미술과 고가구에 심취해 인사동에서 ‘예랑방’을 경영하며 나름대로 성공도 거둔다. 하지만 마흔 다섯이 되던 해 모든 것을 접고 그림의 세계로 떠난 홍화백은 ‘자기만의 조형언어’를 가진 작가로 돌아왔다.

그 길을 꼭 가야만 할 사람이라면 언제가 되어도 그 길을 간다. 하지만 그 속에는 깊이를 잴 수 없는 인고의 세월이 숨어있다. 오늘 저널응접실은 한민족의 모든 도구와 정서를 그림으로 표현한 홍화백의 세계를 따라가 유년시절의 꿈을 마침내 이룬 한 인간의 뜨거운 삶의 여정을 들여다본다.

유년시절에 경험한 절대적인 아름다움

서양화가 홍정희(56세)는 20년 넘도록 혼신을 다해 가꿔온 고미술 가게 <예랑방>을 미련없이 던지고 마흔 다섯 어느날 연남동 화실에 몸을 숨겼다. 은둔한 십년 세월 참으로 많은 그림을 그렸고 왕성한 작품활동은 열 번의 개인전으로 증명했다.

“세살 때 일이예요. 동네 골목에서 놀다 열린 대문사이로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뜨락을 보고 저도 모르게 들어갔어요. 한 여름 햇살을 마음껏 껴안은 꽃들, 벌, 노랑나비.....그 집에는 세퍼트를 키우고 있었는데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만큼 꽃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 개에게 물리는 것도 모를 정도였지요.”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오십을 바라본 연후에야 비로소 화폭앞에 앉을 수 있었던 것은 그때 너무 일찍 아름다움을 보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어린 눈으로 보았던 절대적인 미의 세계를 형상화 할 수 있을지 두려움과 떨림은 그녀를 창작보다는 고미술 세계에 빠지게 했다. 또한 화랑(강남화랑)을 운영하며 젊은 화가를 격려하면서 자신의 내면에서 솟구치는 그림의 열정을 잠재웠다.

그러나 사랑에 굶주린 고아가 먹어도 먹어도 허기지듯 그녀는 마침내 자신속에 숨어있는 수맥을 찾아나서는 여정을 시작했고 자신이 피울 꽃에 물을 대기 시작했다.
살면서 그토록 길어 올리려 해도 올라오지 않던 그 기억의 두레박에서 그녀만의 삶을 끌어 올릴 수 있었던 건 그림을 향한 열정 때문이었다.



‘손 공부에 앞서 눈 공부를 먼저한 화가’

1999년 인사동 대림화랑에서 가졌던 첫 개인전 <삶 99>의 모티브는 고미술과 꽃. 첫 전시회에서 절반 이상이 팔리는 성공은 놀라운 일인데, 그녀의 작품중 몇 점은 관광왔다가 그녀의 전시회를 본 외국인들이 감탄하며 사가기도 했다.

홍정희는 ‘눈 공부를 먼저 하고 손 공부를 나중에 한 화가“라고 스스로를 평가한다. 그 말은 오랜 세월동안 고완(古翫=옛것을 즐기고 취함)의 세계에 파묻혀 살면서 눈이 높아진 대신 숙련기간이 적음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그녀의 경험은 오히려 일찌감치 손공부를 더 많이 한 화가보다 더 깊은 아름다움을 그려내는 저력이 되어주는 것이다.

첫 개인전 이후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그리고 열 번째까지 거의 해마다 작품전을 열수 있었던 건 그녀가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얼마나 많은 무형의 작업을 해왔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홍정희는 골동품을 사랑하는 사람답게 민화, 고가구, 옛날천(무명천, 비단옷감), 조각보등을 즐겨 소재로 다룬다. 그녀는 옛 물건 속에 담겨있는 한국인의 정서를 끌어 올려내 보는 이에게 기억을 되살려내는 기쁨을 선사한다.

프랑스 파리에서 가졌던 6회 전시회에서도 한국의 정서가 세계의 정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지난해(2005년)겨울에 가졌던 열 번째 전시회 역시 현대와 고전의 조화가 뛰어났으며 그녀 특유의 치밀하고 꼼꼼한 구성으로 평단의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책가도(높게 쌓아놓은 책더미와 서재의 여러 가지 일상용품을 배치한 정물화)를 배경으로 한 그림은 고전 속에서 현대 애니메이션을 조화시킨 작품으로 새로운 시도와 흥미로움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찬사를 받았다. 그녀는 2006년에 가질 열한번째 전시회는 어머니가 살고 계신 고향 대구에서 가질 계획이다.


고통은 치열하게 마주 서야 극복된다.

홍정희는 일찍 아버지를 여윈 탓에 그녀의 유년시절은 가난했다. 서울로 이주한 후 힘들게 입학금을 마련해 들어간 대학은 집안사정으로 이내 접을 수 밖에 없었고 그녀는 생계를 위해 돈벌이에 나서야했다. KBS탤런트 공채 시험에 합격해 연기자의 길에 들어섰으나 적성도 맞지 않았고, 대구 사투리가 걸림돌이 되어 그 역시 곧바로 접고 여의도 공작상가에서 <청하공방>골동품점을 차림으로 고미술과 인연을 맺었다.

가난해 그림공부는 할 수 없었던 탓에 그나마 미술과 연관된 고미술을 취급함으로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80년대초 고미술품 가게가 밀집한 인사동으로 진출해 <예랑방>을 차렸다. 예랑방은 시간이 흐를수록 손꼽히는 가게가 되고 여러 문화예술인들이 찾는 사랑방 역할을 하며 꽤 유명해졌지만 마음은 채워지지 않고 허전하기만 했다.

허전함을 이기려 미친 듯이 책을 읽었으나 무병처럼 그녀를 짓눌렀다. 그토록 열심히 했던 장사도 싫고 돈도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예랑방을 접었다. 그리고 수도승처럼 화실로 숨어들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정말 지긋지긋한 자기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마음대로 구현되지 않는 손놀림으로 때로는 손을 잘라버리고 싶기도 했다. 고흐가 왜 귀를 잘랐는지, 고갱이 왜 다 버리고 타이티로 갔는지 비로소 실감되었다.

코피가 터지는 것은 다반사고 눈동자 핏줄이 터져 애꾸눈 잭처럼 안대를 하고 있어야했다. ‘ 아마 나는 죽게 될꺼야“를 수도 없이 되뇌면서 그녀는 그림을 그렸다. 97년, 98년 구상전에서 특선과 동상을 수상하고 작품이 어느 정도 모이자 주변에서 전시회를 권했다. 자신이 없었지만 객관적 평가를 받고도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득하죠. 저의 모든 것을 다 보였다는 점에서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 기특하기도 하고 수치스럽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하지만 제 작품을 다른 사람이 평가한다고 생각하니 신기하고 기뻤어요.”

평론가들은 "생명이 살아있고 에너지가 넘친다"는 면에서 후한 평가를 했다.
화가 홍정희, 혹은 인간 홍정희의 삶은 자신에게 정직한 모습으로 다가가는 치열함 이 늘 베여있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고통이든 자신과 마주하며 승부를 내는 홍화백의 삶속에 성공의 철학이 깃들어 있다.

취재/최의선 편집위원 ces-1102@hanmail.net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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