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악가 유준상 씨.

인터뷰 약속을 위해 성악가 유준상 씨(39)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목소리는 말 그대로 성악가의 목소리다. 굵은 저음, 무게감 있게 다가오는 목소리에서 ‘아 베이스라 들었는데, 역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답답하거나 무겁지도 않다. 굳이 모 오디션 프로에서 유행어처럼 나온 ‘공기 반, 소리 반’이라는 말을 쓰지 않아도 단단하지만 충분히 여백이 느껴지는 그러면서도 주위를 따뜻하게 만드는 목소리다.

왠지 눈에 익은 얼굴이다. 서로 기억을 더듬어 보니 지난해 아트홀 무대에서 노래를 했다고 한다.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다가 객석 사이를 분주히 오가며 관객들에게 사탕을 팔았던, 그래서 큰 박수를 받으며 재미있는 무대를 꾸몄던 바로 그 성악가다.

성악가의 길에 들어서다
어떻게 음악을 시작하게 됐을까. 화려한 프로필을 보고 어릴 때부터 음악신동이라 불린 것은 아닐까 했는데 고등학교 3학년 그의 목소리를 아깝게 여긴 음악선생님의 권유에서 시작했다. 선생님의 눈이 정확했는지 음악으로 진로를 바꾸고 얼마 되지 않아 전국 규모의 콩쿨에서 1등을 했다. 워낙 의대를 준비해왔던 터라 내신 성적도 좋았고 콩쿨에서 실력도 검증받았다. 결국 국내 1, 2위를 다투는 서울 음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동시에 합격, 한예종으로 진학했다.

대학과 국방부 군악대로 군 복무를 마치고 이태리 밀라노에서 유학을 했다. “공부를 하다보니 부족한 것이 느껴졌고, 좀 더 좋은 소리를 내는 세계 최고의 성악가, 베이스가 되고 싶었죠. 당시 국내에는 베이스를 배우기가 어려웠어요. 대학 때도 바리톤의 시인이라 불리던 최현수 교수님께 사사했어요.”

이태리에서는 베르디 국립음악원과 시립음악원에서 공부를 했다. 한국 음식을 지극히 사랑했던 그에게 한인사회가 전무하다 싶었던 이태리에서의 유학생활은 쉽지 않았지만 말 그대로 열심히 했다. 꿈의 오페라 극장 ‘라 스칼라’에서 15년간 주역을 맡았던 베이스 보날도 자이오티에게 사사했고, 유명한 성악가들에게 배우고자 이태리 곳곳을 다녔다. 루치아노 파파로티와 플라시도 도밍고를 만났고, Sanremo 국제 콩쿨을 비롯 여러 대회에 나가 수상하면서 경력을 쌓았다.

이태리 생활을 마치고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에이전트와 계약을 맺고 더 많은 활동을 했다. 시티오페라 하우스에서 데뷔한 후 링컨 센터, 케네기 홀 무대에 오르면서 성악가의 입지를 더욱 다졌다. 그러다가 우연히 디자이너 이상봉 씨의 패션쇼에서 공연을 하던 중 모델로 활동 중이던 부인을 만나 결혼을 했고 긴 외국 생활을 접고 김포에 정착했다.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 중 한 장면.

“행복해지기 위해 노래해요”
김포에 정착한지는 꽤 됐다. 늘 분주함과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다 공기좋고 조용한 곳에 사니까 너무 좋았단다. 신도시도 생기고 도시기반이 잡히면서 예전만큼 조용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그에게 김포는 편안함을 제공한다. “처음 김포는 문화예술 방면으로는 거의 불모지였는데 지금은 많이 발전했어요. 아트홀이 생기면서 다양하고 수준 높은 무대도 가능해졌죠. 김포에서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앞으로도 김포에서 계속 살고 싶어요”라고 김포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다. 지난 7월 김포예총과 김포우리병원이 개최한 <한여름밤의 콘서트>에서는 당시 김포우리병원에 입원해 허리디스크 치료를 받던 중이었음에도 링거를 꽂은 채 연미복을 입고 아리아를 열창, 큰 박수를 받았다.

해외 큰 무대에 서다가 한국에 있으려니 답답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결혼을 하고 살아온 것을 돌아보니 결국 ‘행복해 지기 위해 노래를 부른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그의 행복은 바로 ‘가족’이었다. 음악을 하겠다고 했을 때 아무 반대없이 응원해 주셨던 부모님, 그리고 부인과 어린 아들을 위해 노래를 부른다. 특히 아버지에 대한 마음은 각별하게 느껴졌다. 돈이 필요하다면 “알았다”라고 대답하시고 자신의 차와 집을 팔아 송금해주셨다고 한다. “그 시절에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결혼을 하고 가장이 되고 아버지가 되어보니 당시 그런 생각이 너무 철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며 “이제는 아버지가 삶의 지향점이자 신적인 존재”라며 눈가를 붉힌다.

음악을 하는 또 하나의 즐거움
유준상 씨는 지금도 하루에 다섯 시간씩 연습을 한다. 몸이 악기이다 보니 감기도 안 되고 아파도 안 된다. 밥도 항상 소식을 한다. 스킬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공연을 앞두고는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고자 애쓴다. 그러다보니 스트레스가 심하다. 그래도 노래가 좋다는 그에게 새로운 즐거움이 생겼다. 

음악회와 오페라만으로 먹고 살 수 없는 한국의 현실에서 그도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그런데 학교만 들어오면 안주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치열하게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을 발성부터 차근차근히 가르쳐 보자’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렇게 레슨을 시작했는데 첫 번째 제자가 서울대에 진학했고, 두 번째 제자는 연세대에 합격했다. “사실 그 학생들은 지금까지 상 한번 받아보지 못한 아이들인데 노래를 시작하고 내로라하는 학교에 진학해 부모님께 칭찬받는 모습을 보니 내가 다 희열을 느꼈어요”라며 자신이 노래하는 것과 또 다른 기쁨을 느꼈다고 한다. 아이들이 꿈을 가지고 노래하고, 쉽지 않은 클래식을 선택해 유학까지 가는 것을 보니 이 또한 행복이었다. “열심히 하는 제자를 가진 선생님은 아들, 딸 다 가진 부모보다 더 만족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이 유쾌해 보인다.

김포우리병원에서 주최한 <한여름밤의 콘서트>에서 아리아를 열창, 큰 박수를 받았다.

특별히 애착을 갖는 오페라 배역이나 아리아가 있냐고 물었다. 도니체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L’elisir d’amore)>에 나오는 떠돌이 약장사 ‘둘카마라’, 그리고 그가 부르는 약장수 아리아가 좋단다. 유쾌하면서도 재미있는, 성악가가 이만큼 망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란다. “클래식이 대중화되기는 쉽지 않아요. 크로스오버, 팝페라, 콜라보 등 다양한 시도는 하지만 그것이 클래식 자체일 수는 없잖아요? 그렇다면 우선 클래식도 재미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대중과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계속 해야죠.” 그가 간혹 공연에서 관객에게 사탕을 파는 이유도 그것이다. 관객에게 재미있게 다가가기 위한 노력의 하나인 것이다. 물론 고가(?)에 판 사탕으로 번 수입은 김포문화재단이나 유니세프에 기부를 한다.

오페라에서 주역을 맡기 어려운 베이스 성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고 대개 주인공의 아버지, 장님, 자객, 아니면 나오자마자 죽는 역이 대부분이지만 중후한 매력이 있어서 좋다는 유준상 씨. 완벽한 발성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클래식과 친해질 수 있기를 바라는 그의 모습은 그가 가진 목소리만큼이나 멋지고 행복해 보였다.

이유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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