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단편 <얼굴>을 발표한 이후 깊고 오랜 침묵 속에 빠져있던 소설가 오정희가 2006년 이 봄에 알몸이 되어 우리앞에 돌아왔다.
환갑을 코앞에 둔 예순의 나이에 산문집 <내 마음의 무늬>라는, 정말 무늬만을 걸치고, 작정한 사람처럼 자신의 삶과 내면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완구점 여인>이 당선되어 등단한 이래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동서문학상, 오영수문학상등 주요문학상을 두루 수상하며 최고의 여성 소설가로 군림한 오정희씨는 2003년 독일어로 번역된 <새>로 독일 주요문학상중 하나인 <리베라투르상>을 수상해 한국문학의 해외진출에 테이프를 끊기도했다.
지금도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글은 소설미학의 전범을 따라 배울수 있는 ‘교과서’그 자체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데 그녀의 산문집은 여전히 문체가 유려하고 조용하다. <내 마음의 무늬>에서 그녀의 모습은 “.....이제는 돌아와 거울앞에 선 누이” 이면서 보다 폭넓게 삶을 관조하며 포용하는 큰 작가로서의 면모가 여실하다.
삶에 대한 관찰과 반추의 흔적
오정희씨는 등단한 이후 지금까지 창작집<불의 강><유년의 뜰><바람의 넋>,<불꽃놀이>장편소설<새>동화<송이야 문을 열면 아침이란다>등이 있으며 다작보다는 과작이다. 발표한 작품은 독자들은 물론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고 문학지망생들의 지표가 되는 모범답안지가 되었다.
1990년대말 모 일간지에서 문학평론가 33인을 대상으로 ‘한국문학50년 최고의 작품 50’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황순원, 이문열등과 함께 가장 많은 3개의 작품<유년의 뜰><동경><저녁의 게임>이 선정될만큼 그녀의 문학사적 위치는 독보적이다.
그럼에도 1998년 단편발표 이후 그녀의 새로운 작품을 만날 수 없어 독자들은 그녀가 춘천에 꼭꼭 숨어 버린게 아닌가 궁금해했다.
<내 마음의 무늬>속에는 세월과 그 속을 흘러온 삶에 대한 관찰과 반추의 흔적이 글 곳곳에서 두드러진다. 독립해나간 자녀들에 대한 그리움을 숨겨야하는 초로 어머니의 쓸쓸한 내면, 한 남자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로 문학과 주부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힘겹게 쫒아야했던 지난 날이 있다.
그리고 소설가 지망생들에게 작가로서의 무게가 느껴지는 소설문장론, 평생을 두고 존경했던 스승 김동리와 소설가 이문구, 문학평론가 김병익에 대한 인물평도 들어 있어 작가 오정희의 다양한 모습과 소설가의 일상을 은밀히 엿볼수 있는 재미가 가득하다. 방이 둘뿐인 작은 아파트시절, 그녀는 집필실을 따로 가질 수 없어 좁은 부엌 귀퉁이 조리대옆에 작은 책상을 들여놓고 <존재의 테이블>이라 이름했다.
그곳에서 소설을 쓰고 가계부를 썼던 이야기, 일상에 쫒겨 소설을 쓰지 못할 때의 갈등을 진솔하게 고백하고 있다. “...글을 쓸 수 없는 삶이란 곧 죽음이라는 비장함을 지녔던 지나간 한 시절이 젊음의 열정과 치기로 미소속에 돌아보아지기도 했다.”
소설가 공지영은 오정희의 산문집을 읽고 이렇게 말했다.
“선생의 글을 읽고 있으면 나이 든다는 것, 쓸쓸해진다는 것, 함께였던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그래서 홀로 고요해 진다는 것, 그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자연의 섭리, 생명가진 것들의 질서에 충실하여 후손을 낳고 떠나보내고 순하게 소멸해가는 것이 기쁘고 고마운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선생은 통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한밤중 누군가의 손길없이도 잠에서 깨어나는 것, 그래서 세상이 잠든 한밤중에 홀로 눈을 뜨고 있는 것들과 교감하는 것일께다. 그래서 초로의 일어나 앉아 불을 밝힌다. ...”
시인 최영미는 이런 말을 했다.
“밥짓기 싫어 우는 소설가 오정희는 뜻밖이었다. <중국인 거리>처럼 완벽한 소설을 쓰셨던 대가답지 않은 생활냄새 푸짐한 내면 풍경이 일기처럼 재미있고 친근했다. 부엌에서 손을 씻다가 체중계에 올라가 비대해진 몸을 탄식하는 장면에서는 키들거리며 웃다가, 당신을 글쓰기로 이끈 어린 날의 스승을 그리워하는 편지는 서늘하게 감동적이었다. 대한민국의 안개자욱한 지방도시에서 어머니이자 아내이자 작가로 살면서 당신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시간의 무늬들은 정갈하고 따뜻했다. ..”
<시간의 얼굴>산문은 그 연령을 사는 사람 모두에게 “그래, 정말 그래..”공감을 끌어내며 사뭇 가슴을 친다. “...마흔 살이란 앞만 보고 달려온 걸음앞의 커다란 걸림돌이다. 설혹 잘못 들어선 길이라는 것을 깨달아도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있다는 것, 인생의 성패는 이미 판가름난 것이 아닌가라는 성급한 판단에 초조해지기도 하고 잘못 끼워진 첫 단추가 이제야 확연히 보이는가 하면 여념없이 살아온 날들에의 반성과 검토, 게다가 한 인간으로서 내가 무엇이며 어디에 서있는가라는 실존적인 물음앞에 피할 도리없이 맞서야하기 때문이다. ...”
자신만의 집필실 마련 책상앞에 앉은 작가
한 줄의 문장을 위해 밤개 끙끙대는 완벽주의, 5.18광주등의 역사를 증언하지 못하는 부채감, 불가해한 삶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하는 난감함이 그를 과작에 머물게 한 진짜 이유라는 것을 이 책은 넌지시 알려준다.
“우리 시대 문학을 알고 싶어 후배작가들의 작품을 꼼꼼하게 읽지요. 요즘 소설이 인터넷 등의 영향으로 가벼워졌다는 이야기들을 하시는데 시대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감수성이 나타났다고 이해하고 있읍니다...”그렇지만 자신은 그런 경향을 배울 생각이 없다고도 했다.
오정희씨는 최근 자신만의 집필실을 마련했다고 했다. 소설도 다시 쓰겠다고 했다. 소설노동자를 자처해온 그녀는 어떤 작품을 선보일까? “..나는 소설을 쓸 때 한 단어, 한 문장에 최대한의 의미를 담도록 노력한다. 일상적으로 쓰이는 평범한 단어에 시적 울림과 상상력, 의미를 담고 싶어하는 것이다...”(203쪽)
그녀의 새로운 소설은 나오지 않았지만 어떻게 쓰여질지는 느낄 수 있다.
취재/최의선 편집위원<작가>ces-11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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